p24

"하지만 자네는 여기와 어울리지 않아"

이렇게 말한 후 기쿠 박사님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너무나도 괴로워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그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 제일 처음 떠올린 생각은 내가 잘못 들었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신 거죠?"

"자네는 잘했어. 다만 휴식이 좀 필요한 것 같네."

휴식이라니? 나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휴학을 하고 천천히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한 학기 정도 생각을 좀 해보게. 만약 그후에도 자네가 이쪽 공부를 계속하길 원한다면 내가 다른 연구실에 추천서를 써줄 수는 있네. 자네 실력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자네는 잘했어. 단지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야."

나는 그제야 미츠오 기쿠 박사님이 내 경력에 종말을 고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네, 종수. 하지만,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 어쩌면 이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좋은 기회라고요?"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그냥 여기와 어울리지 않는 거야."

"알겠습니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 대답하는 편이 그나마 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가만히 있는 기쿠 박사님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기쿠 박사님이 내게 말했다.

"종수, 인생은 길어, 정말이지 길어."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p65

하지만 그런 사실과 별개로 내게 이 두 명의 저자 중 한 사람의 손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앤 라이스의 손을 들고 싶다. 그건 순전히 그녀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랄프 로렌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로 사랑스럽다. 나는 앤 라이스의 글을 읽으며 넋이 나간 표정으로 랄프 로렌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그런 그녀의 모습 덕분에 무척 기분이 좋아진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정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p74

"죽은 자의 죽음은 언제나 살아 있는 자의 실패입니다."

p78

그는 언젠가 문에 대고 이렇게 소리친 적도 있었다. "종수, 혹시 죽은 거야?" 나는 그 질문이 완전히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진짜로 죽었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고, 실제로 나는 죽지 않았지만, 절대 그에게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래도 몇 년이나 지났지만, 이제 와서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지아 류가 내게 "종시, 혹시 죽은 거야?"라고 물으면서 문을 그토록 두드릴 때, 그를 향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아니, 아직은, 류, 기쿠 박사님이 인생은 길다고 하시더라." 그리고 역시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지아 류의 노크는 어쩌면 나를 향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는 나의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건 무엇을 위한 노크였을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당시 (안 그런 척했지만) 나 역시 그의 노크를 기다렸다는 사실이다. 그건 굉장히 모순된 감정이었다. 나는 내가 진짜 현실을 영원히 외면하게 되기를, 그래서 랄프 로렌과 관련된 그 자료들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기를 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나를 이 랄프 로렌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p88

"아마 전 수영이의 마음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고 싶다는 그 마음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걸 가지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건데, 그걸 가지지 못하는 게 대체 무슨 대수일까요? 저는 수영이를 어리석다고 느꼈는지도 몰라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요. 편지를 쓴다 한들 어디로 보내겠어요. 보낸다 한들 그걸 랄프 로렌이 읽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읽는다 한들 그가 시계를 만들어준다는 보장이 어디있겠어요.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너무나 허황되고 이상하고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는 그 일에 뛰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저는 수영이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애의 부탁을 받아들인 거예요."

p93

하지만 어떤 날은 더너웨이의 영화조차도 아무 소용 없어진다. 그런 날이면 지아 류가 내 집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떠오른다. 나는 철제로 만들어진 싸구려 침대의 헤드 부분을 똑똑, 하고 두드려본다. 이 세상의 누군가가 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내가 처한 그 모든 상황이 갑자기 너무나 뚜렷하고 명확하게 다가온다. 그건 단순히 느낌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정말로 부피와 질량을 가진 어떤 것이 나의 어깨와 등, 그리고 팔을 움켜쥐고 아프게 하는 것에 가깝다. 나는 그러한 '사로잡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낀다. 랄프 로렌이니, 수영이니, 랄프 로렌 컬렉션이니, 편지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고 나 자신이 거대한 '쓰레깃더미' 한가운데에서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좌절감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p151

하지만 그들 각각의 기억들은 지극히 제한적이어서 때때로 정면으로 배치되고 모순되고, '순수하게' '말이 안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그러한 어긋남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나중에 '들음으로써' 그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에야, 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풍부하고 생생한 기억의 토막들이, 언어화되는 동안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마치 안개 속을 더듬거리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워진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방금 전까지의 머뭇거림이 무색할 정도로 이야기에 탄력이 붙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용케도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을 끄집어낸다. 심지어 처음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던 사람들마저 그랬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있노라면, "나의 말이 나의 기억을 불러오는군요"라는 헨리 카터의 말이 그저 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곤 감탄했다. 그들의 말이 불러온 그들의 기억 중에서 조셉 프랭클이나 랄프 로렌과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말이 되는' 것만 기록하면, 의외로 아주 적은 분량만 남았다.

p196

제임스 빌이 보내준 조셉 프랭클의 편지에는 딱 두 줄이 적혀 있었다.

귀하의 가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프랭클 시계방은 오늘로 문을 닫습니다.

나는 그가 백여 장의 편지지를 한쪽에 올려둔 채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쓰고 서명을 남기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감사했다는 표현도 없고 회한에 잠겼다거나 하는 흔한 감상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무려 사십여 년이나 일했던 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이 쓴 문장치고는 지나치게 간단명료했다. 게다가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니.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문장을 쓴 것일까? 그가 시계방의 문을 닫기 전에, 자신의 인생에 속해 있던 문들 가운데 영원히 닫아버린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권투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좀 놀랐는데, 조셉 프랭클이 권투를 무척 사랑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흔 살까지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p242

물론, 그 모든 이야기에는 미묘한 거짓이 섞여 있었다. 생략과 강조를 통한 전형적인 거짓말들. 그 결과 섀넌은 내가 대학원을 자의로 그만둔 것으로, 지아 류가 나를 평소에 무척 의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기쿠 박사님이 내게 밀크티를 타주며 대학원을 떠나 달라고 빙빙 돌려 말한 그날을 설명할 때, 박사님이 말한 내용은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다만 그가 내게 밀크티를 얼마나 열심히 만들어줬는지, 나를 부르기 위해 자신의 연구실을 얼마나 깨끗이 청소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말했다. "그는 한 번도 학생에게 그런 식으로 차를 맏늘어준 적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깨끗한 연구실에 학생을 초대한 적은 더더군다나 없죠." 그녀는 나를 학문에 싫증을 느껴 한순간에 직업을 바꿔버린 자유로운 영혼쯤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p270

"(...) 그 전에 나는 꽤 괜찮은 삶을 살았거든요. 누군가를 아프게 한 적도 없고 상처준 적도 없다고 믿으면서 살아왔어요. 난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대면해야 하는 삶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어요. 이봐요, 거기엔 엄청 훌륭한 학생이 있었거든요. 지아 류 말이에요. 있잖아요, 그 친구는 내가 학교에 안 나간 후부터 내 집 문을 두드렸어요. 노크 말이에요. 누군가 내 집 문을 노크해줬죠. 섀넌, 나는 그걸 계속 비웃었지만, 이제는 비웃는 걸 그만해야 할까봐요. 섀넌, 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p310

다음날 지역신문에는 잭슨 여사의 부고가 실렸다. "2012년 12월 15일 레이철 잭슨 영원히 눈을 감다; 세월에 지지 않았던 강인한 여성,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쳤던 여성, 평생 동안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사랑했던 레이철 잭슨의 명복을 빕니다." 조셉 프랭클과 랄프 로렌은 '가지지 못했던' 부고였다. 나중에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잭슨 여사의 부고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고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애정, 그리움이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의 원망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고. 이를테면 이 부고의 마지막 문장, "평생 동안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사랑했던"이라는 문장에서는, 살아생전 요크빌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던 잭슨 여사의 고집에 대한 자손들의 질책이 느껴진다. 조셉 카터의 부고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부고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그의 인내심과 낙천성은 언제나 모범이 되리라." 여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비꼬는 듯한 어조와 반어적인 느낌이 담겨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고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 -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을 간결하고 우아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이모가 죽은 후에 어머니가 왜 그토록 그녀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p320

고개를 끄덕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문득 왜 그녀에게 '정말로' 궁금한 것 - 왜 그날 새벽 그렇게 나를 떠나버린 것인지, 왜 내게 키스를 한 것인지 - 을 물어보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진심'을 말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듣고 싶지 않았다.

Posted by ikp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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